지겹던 장마가 지나자 이제는 찌는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축축한 습기가 싫어서 차라리 더위가 낫겠다고 푸념을 했었는데, 변덕스러운 내 마음은 이제 이도 그도 다 싫다.
"이렇게 더운데, 그것도 남의 아이를 보다니, 엄청 고생하겠네. 어떻게 해?" 가까운 벗이 내 걱정을 해 준다. 그러나 그 걱정은 기우일 뿐임을 말하고 싶다. 고생이라니, 천만의 말씀 만만의 말씀이다.
서현이네 가는 날은 일찌감치 집안일을 끝내고, 상쾌하게 샤워를 하고는 발걸음도 가볍게 집을 나선다. 나를 목빠지게 기다리는 서현 엄마와 앙증맞은 손으로 나를 반기며 덥썩 안기는 서현이가 있으므로 오히려 즐겁다.
오늘로 서현이가 세상에 난 지 8개월 8일째. 누워만 있던 2개월짜리 아기가 이제는 기어 다니는 씩씩한 (엄마말 로는 빨빨빨 기어 다닌단다) 아기가 되었다. 처음 며칠을 배로 슬금슬금 얌전하게 기어 다니더니 요즘은 정말 초스피드로 기어다닌다.
서현이의 모든 길은 입으로 통한다. 장난감, 손수건, 이유식용 식기, 보행기 등판, 심지어는 내 어깨와 팔도 마구 마구 빨아댄다. 심심하면 점잖게 엎드려서 낑낑대며 제 발가락조차 빨아대니, 그 모양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총명한 두 눈이 빛을 발한다 싶더니 포복실시! 목표물을 향하여 마치 올챙이가 물속을 헤엄쳐 가듯이 배밀이로 사정없이 기어가니 그 모양 또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 속도 또한 엄청 빨라서 도저히 8개월 아기라고 믿기지 않을 정 도... 그래서 번개가 별명이 되었다. 김. 번. 개.
그렇지만, 하룻 강아지(8개월 강아지인가?)가 이모의 내공을 몰라봤지? 이래뵈도 이모는 만만치 않은 언니 오빠를 둘 씩이나 키워낸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라구. 선풍기 전선을 잡았나 싶었을 때 금새 허리춤을 잡혀 버린 불쌍한 우리 서현이는 그날 온 집이 울리도록 처절한 비명소리만 질러댔다.
그러나, 서현이가 연약한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 사건이 일어났다. 어제, 서현이와 함께 공굴리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음악소리가 나는 플라스틱 공을 굴리며 "데굴~ 데굴~" 소리를 내면, 손뼉을 치며 좋아하거나 때로는 물끄러미 구르는 공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근데, 그 공은 스스로도 움직이게 설계되었기에 똑바로 굴리 기가 퍽 힘들었다. 곁에서 보시던 할아버지께서 비치볼을 꺼내서 불어주셨다. 새로운 것에 금방 마음을 뺏긴 서현이는 공을 굴리다가도 곧장 시선이 비치볼에 가서 꽂히기 일쑤였는데 웬걸!
비치볼이 완성되어 던져주자, 서현이는 깜짝 놀라 내 품을 파고 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커다랗고 통통 튀는 비치볼에 놀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비치볼이라고는 난생 처음 보았으니... 그러면서도 공을 한 번 쳐다보고는 또 울고, 또 한 번 쳐다 보고는 또 울고를 반복하였다. 그 모양이 우스워서 어른들은 또 한바탕 깔깔대고 웃었다.
간신히 안고 달래어서 만져보게 해도, 할아버지와 내가 공 을 튀기거나 만지는 시범을 보여도 영 두려움이 가시지를 않아 결국 공놀이를 중단했다. 처음보는 공조차도 무서워하는 겁많은 아기 서현이... 서현이와 지내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어느새 퇴근한 엄마가 왔다. 어떤날은 일찍 퇴근한 서현 엄마가 야속할 때도 있다. 항상 고마워하시는 서현 엄마를 뒤로 하고, 더 행복한 서현 이 되길 기도하며 서현네를 나선다.
이 무더운 날 종일 집에 있었다면 무얼 하고 지냈을까? 그냥 저냥 시간을 보냈겠지만, 이렇게 생동감있고 즐겁게 보내지는 못했으리라. 내게 이런 즐거움을 공유하게 해 준 여러분들께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접는다.